목선 철인의 때 | 운영자 | 2019-04-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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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선 철인의 때
저의 고향 덴마아크의 적은 항구도시는 훌륭한 선박과 뛰어난 선장들로 전국에 잘 알려져있었다. 그리고 덴마아크의 모든 소년들은 바다를 사랑했다. 나도 배를 좋아했고 선원이 되기를 원했었다. 그때는 목선과 철인(무쇠 같이 강한 사람)의 때였는데, 나도 철인이 될 결심을 했다. 배가 침몰하면 배와 함께 침몰하는 것과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선장이 되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사망으로 내가 바다를 진출할 수 있는 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내가 여동생 셋과 어머님이 묻힐 열려진 무덤을 들여다 본 기억이 채 살아지기 전 3 개월만에 아버지께서도 바로 그 교회 뜰 묘지에 장사되었고, 내가 14살 때 조부모를 잃고 결국 아무도 돌봐 줄 사람 없는 집 없는 아이가 되었다. 그래서 바다로 나왔다. 횡범선에서 종사 처음에는 선실 담당 소년으로 일을 시작했다. 술을 마시는 것은 아주 멋있게 보였으며, 내가 술꾼 선원이 되는 해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횡범선의 돛대 앞에 일하던 소위 북대서양의 배에서 가장 거치른 사람으로 불리는 사람들과 함께 종사를 했다. 독일, 영국, 노르웨이, 덴마아크 등의 선상에서 일을 했으며, 잠깐이나마, 불가(불란스, 카나다) 선에서 선장도 했었다. 그 생활은 거치른 생활이었다.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시골의 적은 동리 만한 큰 빙산이 떠있는 북극권으로도 항해를 해 보았고 맨나무 침대에 담요 한 장 없이 잠도 자 보았고, 옷도 없이 지내기도 했다. 선장에게 간청도 해 보았다. "선장님, 저에게 일 파운드만 주신다면 시내에 들어가 옷을 살 것이며, 훌륭한 선원으로서의 행위를 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배에서 떠나자 즉시 시내의 술집을 찾았고 '한잔만' 마시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또 한잔을 들게 되면 의복점도 사라지고 선장과의 약속도 모두 잊게되었다. 결국 몇 가지 옷을 얻어 다시 배로 돌아가면 신은 얻을 수 없게 되었고, 항상 그와 같은 패배의 생활을 되풀이하게 되었고 범포 자루속으로 기어 들어가 겨우 체온을 유지한 밤을 얼마나 보냈는지 모른다. 조모에 대한 기억 전날에 덴마아크에서 할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에 다니던 때를 종종 생각했다. 그 전 성경도 많이 외울 줄 알았고 "내 주는 강한 성이요.....십자가 군병들아....." 등의 옛 찬송도 잘 불렀다. 그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이제는 항구로 들어가면 술을 마셔 돈을 없애지 않을 것이며, 집으로 돌아가 학교에 다니겠다고 약속을 했다. 생명을 보존함 다만 하나님의 자비로서 나는 겨우 죽음을 피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1909년 이른봄 북 대서양 해변의 노도에서 첫번 기항지에 기항을 시도하고 있을 때, 배는 모래둑에 부딪히고 말았다. 한번 부딪혔을 때는 추진기가 날아가고, 두번째 부딪혔을 때는 키가 날아가고 어찌할 도리가 없게 되었다. 배가 부서지기 시작할 무렵, 언덕 위에 세워진 흰색의 적은 교회를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보다 나은 소년이 되고자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른다. 교회의 종은 울리기 시작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기 위해 성도들을 불러모으고 있었다. 비록 우리가 죄인들이었으나,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사 기도를 응답하여 우리의 배가 무사히 구조를 받게 된 때도 있었다. 내가 다른 배를 탔을때 좋지 못한 조원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가 19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돛대 앞에서 일하는 최고의 선원이 되었으므로 다른 선원들이 질투를 했다. 그 배의 목수는 나를 없애기로 결심도 했는데 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자비 때문이었다. 기회를 잃어버림 한번은 신원 동료 한사람에게 나와 같이 교회에 가자고 했다. 술꾼 선원은 이제 지쳐 버렸다. 우리는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어느 조그마한 교회로 찾아갔다. 문 앞까지 와서는 들어갈까 말까 주저하며 마음에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그때 친구가 갑자기 돌아서며 "난 한번 더 배를 타겠어." 라고 했다. 그래서 나도 그를 따라 가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는 교회 문을 밟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는 술을 마시고 배에서 일을 하다가 바다에서 익사하고 말았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나의 마음속에 이야기 해주셨다. 후에 나는 해양 감시대에 가입하여 소임을 맡은 장교로 있다가 제대를 하여 정착도 하고, 술도 마시지 않기 위하여 오레곤주 포틀랜드로 왔다. 그러나 의지할 곳이라곤 아무 곳도 없어 결국은 옛 돛대의 범선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새 소식을 들음 다시 여러 해가 지나서 어느 큰 미국 선박을 타고 하와이 제도에서 돌아와 집도 친구도 없이 비참파고 실망한 상태로 포틀랜드의 번사이드 2가에 서있었다. 내가 그곳에 서 있을때 사도의 신앙교회에서 성도 몇 분이 노방 전도를 하려고 나왔다. 그들은 하나님이 나를향해 하신 일을 말해주었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노방집회가 끝날 무렵 그들은 거기 선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 중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도를 원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보시오." 라고 했다. 거기 선 사람들 중에는 선창 노무자도 있었고, 나뭇꾼도 있었고, 선원들도 있었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나도 하나였다. 그들은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원했다. 나는 손을 들었다.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나를 선교용 자동차에 태우곤 그들의 집회 장소로 가서 나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나도 기도를 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갑자기 마음이 정돈됨 그날 밤 하나님이 나에게 오셔서 내 마음을 평온케 해주셨고, 내 생활을 변화시켜 주셨다. 거듭남을 받게된 것을 알게 되었다. 세상도 나의 거듭난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선원 동료들에게 돌아가서 주님이 나에게 해주신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들은 여러 번 나에게 술을 마시게 할려고 유혹을 했으나, 술에 대한 욕망이 없어졌다. 그후 한번도 술집으로 들어갈 유혹을 받지 않았다. 나는 세상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가 있었다. 보상 나는 언제나 사람이 죽기 전 반드시 자기의 기록을 깨끗이 해야 한다고 믿었다. 나는 온 세상에 보상해 줄 것이 있었다. 이 회사, 저 회사에 보상을 편지를 보내고 내가 모시던 상관들에게도 하나 하나 편지를 썼다. 집에도 편지를 했고 덴마아크 정부에도 편지를 썼다. 그뿐 아니라 미국 정부에도 보상을 했고 그들은 나를 용서해 주고 후에 시민증까지 주었다. 40년간 매월 나의 여동생들에게 편지를 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신 사실과, 이제는 더 이상 술 취한 선원이 아니란 사실을 편지했으나, 그들은 내가 이상한 미국 종교 이단에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은 포틀랜드 교회에서 나의 친구가 덴마아크에 있는 내 동생들은 방문하고 하나님이 나에게 해주신 사실을 말해 주었으나 믿지를 못했다. 그러다가 막내 여동생이 직접 와서 보기를 작정하고 포틀랜드로 와서 두 달간 우리 집회에 참석한 후, 시바 여왕의 말과 같이 "들은 말이 절반도 되지 못합니다." 하고 돌아갔다. 나는 지난 여러 해 동안 기쁨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고 있다. 이제 다른 선원들이 옛부터 내려오는 복음을 받은 것을 보는 것이 내 마음에 최대의 기쁨이다. 이 복음은 참 만족을 주고, 어떠한 환경에서도 불의에서 자신을 지켜 주는 것임을 잘 안다. 나는 그것을 실제로 증명해 보였다. --M.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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