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이름으로 라는 미혹 | 운영자 | 2019-04-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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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이름으로"라는 미혹 하기야 지금과 같은 배도가 심한 때에 소위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거짓된 교리와 그와 유사한 교리들이 나타났다고 하여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다. 이것이 곧 말세의 표시가 될 것이라고 성경이 경고하여 준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계속하여 경고해 주는데도 그와 같이 성경에 이탈되는 예언들이 많은 추종자를 얻고 있다는 것은 실로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미혹적인 교리가 많은 사람들을 크게 당황하게 하고 혼돈하게 하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이 교리의 거짓된 점들을 밝혀 보고자 한다. 이 교리는 성경의 두 가지 기본 교리를 부정한다. "예수의 이름으로"라는 외적 간판을 내걸고 그 속에서 희미하게 근본 교리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첫째로 "삼위일체론"을 부정하며, 둘째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원한 존재성"을 부정한다. 이 거짓된 교리를 옹호하는 자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 하나님 안에 위도 하나밖에 없는데, 그 유일한 위가 곧 예수라"고 한다. 그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신이란 유일한 자 예수라 이름한 한 위의 3가지 표명에 불과하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성부의 이름이 예수이며, 성자의 이름이 예수이며, 성령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 어디 한 곳에라도 성부와 성령을 예수라 부른 곳이 있는가? 그리고 그들은 말하기를, 비록 예수께서 성부와 성자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직접 명령을 했으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이다."라고 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은 곧 예수의 이름만으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며, 예수의 이름으로란 말이 주님의 제자들이 사용한 용어이며, 사도행전에 기록된 몇 구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 증거로 삼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탄생하기 전에는 존재치 않았다고 하며 아들로서의 예수는 다만 일개 사람에 불가했다고 주장한다. 이 이론대로라면 하나님의 아들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그 영원한 말씀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이 흔히 쓰는 말을 인용하면 요한복음 1장 14절에 기록된 "아버지의 독생자"란 이 "독생자"가 있기 수 백만년 전에 존재한 하나님이 바로 그 유일한 위라고 한다.이 설을 다시 전개하여 말하기를 예수가 탄생하실 때 "한 위"밖에 없는 하나님 즉 영원 전부터 한 분밖에 없던 그 성부 예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마리아의 애기로 화신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 애기가 성자 예수 성부 예수로 되었으니 두 인격이 한 위 중에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마지막 문장에 나타난 그 심오한 뜻만은 완전히 측량할 수 없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기술한 것은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 교리를 실제로 공정히 기술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삼위일체 교리"와 "하나님 아들의 영원 전부터의 존재설"을 기술한 것과 같이 과감하게 부정한 것만으로도 이 교리가 얼마나 굽었으며 가짜인가를 한 눈에 충분히 알 수 있다. "예수의 이름으로" 이 무리들의 논쟁의 대부분은 신약에서 번번히 나타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등의 표현을 어떻게 번역하는가에 달린 것이다. 이와 같은 표현들이 나타내는 참뜻이 무엇인가? 그들은 이 교리를이와 같이 설명한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되"란 말은, 예수란 이름을 뜻하는 것인데, 그 예수란 이름이 화신될 때까지는 나타나지 아니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어리석은 이론은 성경을 연구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장난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걸으라"고 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란 말의 참 뜻은 어린아이도 확실히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뜻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세로 멍하노니 걸으라"는 뜻이다. 이것이 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다 할지라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란 말의 참 뜻임을 그 누구도 의심치 않을 것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되"란 예수님의 말씀의 뜻은 "내 아버지의 권세로 왔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어떤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고 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이 분부를 내리셨다는 것인데, 곧 "예수의 능력과 권세로" 복음의 역사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사도행전에서는 시종 베드로나 그 외 모든 제자들이 성역을 하는 동안 "예수의 이름으로"란 표현이 자주 나타났는데 그 말은 그들이 "예수의 능력과 권세만으로" 행하였다는 뜻이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많은 무리 앞에서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한 말은 이 이론을 옹호하는 자들의 말대로 베드로가 세례를 줄 때 써야되는 다른 형태의 말, 즉 "새로운 빛"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다. 절대 그런 뜻은 아니다. 그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의 이와 같은 거짓선지자들보다 주님의 명령을 더욱 세밀하게 문자 그대로 수행했다. 또한 베드로가 그와 같은 말을 할 때는 세례식을 거행하는 때가 아니었으므로 물 세례식 때 사용하는 그 모든 말을 그대로 다 할 필요가 없었다. 현재의 목사들도 그와 같이 한다. 이들이 말하는 것 중에 또 다른 한 예는 바울의 목회 중에 나타난 것인데, 바울이 에베소에 갔을 때에 그곳에 있던 12명이나 되는 제자들이 바울과 간단한 이야기를 나눈 후 "주 예수의 이름으로"세례를 받게 되었다. 이 말을 그들은 또 자기들의 교리에 대한 보충적인 증거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들이 너무 조급한 행동으로 서둘다가 그 대화속에 있었던 일을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그들에게 바울이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으니 그들은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노라"고 했다. 다시 그들에게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었다. 왜 바울이 이러한 질문을 했을까? 이 런 질문을 한 이유는 만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인의 세례를 받았으면 예수께서 명하신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것이니 성령에 관하여 들었을 것이다. 이 대화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말은 단순히 이 제자들이 앞서 받은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인의 세례"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이 사실로 보아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명하신대로 문자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것이 분명하다. 누가 하늘에서 내려왔는가? 지금까지 설명한 것을 보면 이 예언자들은 하나님 안에 한 위 즉 성부 하나님밖에 없었으며 성자는 동정녀마리아에게 탄생하기 전에는 존재치 않았다고 한다. 그들의 교리대로라면 성부 하나님이 하늘의 보좌를 떠나 베들레헴 말구유에 애기로 화신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 이론이 사실이라면 몇 가지의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성부 하나님이 땅 위에 오셨다면 그가 땅 위에 계시는 동안 누가 하늘의 빈 보좌를 채웠을까? 그리고 예수께서 하늘을 향하여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라고 기도를 드릴 때 누구에게 기도를 했으며, 만일 예수 자신이 성부라면 왜 위를 바라보며 하늘을 향하여 기도했을까? 또 그때 땅에 계셨던 자신이 성부라면 왜 주 기도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가르쳤을까? 예수님이 세례(침례)를 받으실 때의 기록 사항을 보면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했다. 또 다른 경우에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하니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했다. 만일 예수님이 성부였다면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는 누가 누구에게 한 것일까? 예수님은 여러번 "나를 보내신 자"란 말씀을 하셨다. 만일 예수가 성부라면 누가 그를 보내었단 말인가? 성경에서 자주 반복하여 나타난 "나를 보내신 자"란 말의 뜻은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을 말한 것인데, 요한복음이나 성경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대로 "보내셨다"는 말의 뜻은 영원 전부터 성부와 함께 계셨던 그 아들 성자를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뜻 외에 다른 뜻으로는 생각할 수 없다. 예수님 자신이 직접 말씀하시기를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하늘로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했다. (요한복음 3장 13절) 그가 곧 하늘에 계셨던 그 아들이며 또한 하늘에서 내려온 그 아들이라는 뜻인데,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이보다 더 명확한 설명이 또 필요하겠는가? 예수님은 또한 중보자로 오셨다. 바울은 이 사실을 뚜렷하게 지적하여 주었다. 보증자는 한편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중보의 역할을 해야 하는 양편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니, 이 양편이란 성부 하나님이 한편시이며, 또한 모든 인류가 그 다른 한편이란 뜻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 사이의 중보자이시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 (중보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한일서 2장1절) 어찌 예수님이 중보자 혹은 대언자가 되시며 동시에 성부 하나님이 될 수 있는가? 이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하나님의 세 가지 표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면 나를, 당신, 당신에게, 그가, 그를 등의 인칭 대명사가 계속하여 나타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나타낸다. 이 말은 "하나님의 위"간에 서로, 흑은 하나님과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 같이 나타났었다. 이 사실을 비추어 보면 그들의 교리가 얼마나 비성경적인 모순인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위 모든 논쟁의 귀착점은 "하나님의 위"에 대한 문제이다. 이 이론은 새로운 것이 결코 아니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계명시로부터 원수들의 공격 대상이 되어 왔다. 고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소위 이 "근대의교리"역시 옛날에 머리를 들려고 하다가 죽음을 당하여 장사 지낸 그 쾌쾌묵은 설을 다시 부활시킨 것에 불과한 것이 선명하다. 이 문제에 관한 쟁변은 초기 기독교사에 나타나 있다. 초대교회 당시 어떤 무리들은 "하나님의 본질"과 "위"를 구별하지 못한고로 그런 오류를 흔히 범하게 되었고, 거기에서 그들이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 교리"에 대적이 되었다. 그들의 실제의 이론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면 위도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때로부터 계속하여 심심하지 않게 그와 비슷한 무리가 옛날의 바로 그 이론을 들고 나와 망령되이 전하여 왔다. 그리고 주후 700년경에 마호맷교 무리들이 부르짖고 나온 말이 이러하다. "신은 하나밖에 없다. 그리고 마호맷은 그 하나밖에 없는 신의 선지자이다." 그들은 기독교인을 가르켜 "다신론자"라 하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인은 하나님 안에 삼위가 있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때에도 이교의 무리가 일어나고 있는데 곧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또한 그 위도 하나라"고 주장하는 자들이며 "예수의 이름으로" 혹은 "예수만으로"라고 외치는 자들이다. 그들이 지금까지 이 이단설을 대외적으로 내세우기 위하여 단조롭게 주장하는 것은 바로 그 하나의 위가 예수라는 놀랄만한 설이다. 한 분의 참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진리는 믿는 자로서는 아무도 부정 못할 진리이다. 이 진리는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진리이다. 전 논제의 난점 해결은 나타난바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와 본질과 그 위를 구별하는데 있다. 존재 문제나 본질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은 한분이란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 안에 "셋의" 뚜렷이 구별된 "위"가 있음을 밝히 가르쳐 주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다.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하실 수 있는 것은 존재에 있어서와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기 때문이요, 그러나 위에 있어서는 뚜렷이 구별되어 있다. 아들은 지상에 계셨고, 아버지는 하늘에 계셨다. 아들은 아버지께 아버지는 아들에게 서로 이야기 하셨다. 삼위일체론의 성경적 근거 "예수의 이름으로"란 교리의 거짓성과 모순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지금까지 열거한 성경만으로도 합리적인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충분한 설명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삼위일체론을 설명하는 모든 성경적 근거를 다 열거할 수도 없으며 이 이론을 재론하기도 불가능하니 여기에서는 그 문제를 회피하자. 그러나 정통 기독교 작가들이 기록한 책 중에 이 문제를 철저히 다룬 것이 많다. 그러므로 한마디로 축소시켜 이야기하면 삼위일체론은 잘 설명된 교리이며, 수세기 동안 기독교의 기초석이 되어왔으며, 참 그리스도인은 한 사람도 이 교리가 성경적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의심하는 자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 몇 가지의 구절만 간추려 삼위일체론을 보강하려 한다. 하나님의 위가 복수라는 것은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칭에서 나타난다. 히브리어로는 "엘로힘"인데, 이 단어는 복수형이고 하나님을 부률때 가장 일반적으로 흔히 사용한 명칭이다. 또 하나님의 "위"가 복수라는 것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도 나타 났으니 곧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 (창세기 1장 26절)고 한 것이다. 삼위중의 첫 위가 창세기 11장 7절과 이사야 6장 8절에 나타난다. 그리고 보좌 앞 스랍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노래한 3중 찬양은 하나님의 삼위를 뜻한다. 다윗이 기록한 두 편의 메시야적 시편은 하나님 안에 성부와 성자가 존재함을 결론적으로 증명한 것이다. 시편 제2편에 보면, 성부께서 직접 나의 아들이라고 호칭한 사실이 나타난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시편 2장 7절) 그리고 시편 2장 12절에도 역시 "아들"이라 호칭되어 있다. 그리고 시편 110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는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고 했는데, 이 구절은 예수님이 직접 불신의 바리새인들에게 자기가 성부와 함께 있었던 그 영원한 아들됨을 증명하실 때 인용한 구절이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마태복음 22장 45절) "그때 바리새인 중에는 그 말에 한 마디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 "현대 예언자들"은 대답할 줄 안다. 예수님께서 성자로서 성부와 함께 계셨던 영원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것을 최고 목적으로한 이와 같은 메시야적 시편이 있는데도 이들은 뻔뻔스럽게도 동정녀 마리아를 통하여 탄생하기 전에는 존재치 않았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신약에 넘어봐 보면 하나님 안에 삼위가 계심을 더욱 뚜렷하게 증명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요한복음의 서론은 확실히 아들의 영원한 존재성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복음의 초두의 말씀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요한복음 1장 1절)고 했으며,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현대 예언자들"이 담대히 외치는 대로 하나님 안에 한 위밖에 없다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후에 육신이 된 이 말씀은 누구란 말인가? 이는 태초에 성부와 함께 계신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외 다른 그 누구도 아니다. 그뿐 아니라 사도들의 축도문에도 하나님의 삼위를 인정한 것이 나타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고린도후서 13장 14절) 최종적으로 예수님 자신이 삼위일체론을 절대적으로 지원하셨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했으며, 또 특별한 말씀을 주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했다. 이들은 자기들이 강조하는 설을 성경적 권위 위에 올려 세우려고 노력하던 나머지 성경의 몇 구절을 뽑아 본의와는 달리 왜곡되게 자기들의 사상에다 끼워 맞추게 되었다. 그래도 여러 세기동안 기독교의 보루가 되어온 성경의 근본 교훈이 그와 같은 가냘픈 설에 좌우되지는 않는다. 삼위일체론은 진리만을 나타내려는 사람들이 신실한 목적하에 오랜 세월동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루어 놓은 연구의 최후 결론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정리된 이 교리가 하나님의 인정의 "인"을 얻게 되었으니 이 교리를 고수하여 가르친 성역 위에 하나님의 많은 축복이 나렸으며, 많은 영혼이 구원함을 얻게 되었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이 그들이 말하는 이 말씀에 맞지 않으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빛을 보지 못하리라" (이사야 8장 20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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