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보장 | 운영자 | 2019-04-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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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보장 -인기 있는 미혹- '영원한 보장' 이라는 말은 '성도의 견인' 또는 '구원받은 자의 보존' 즉 '한 번 은혜 안에 거하면 그 은혜 안에 언제고 거하게 된다' 여러 가지 말로서 알려져 있는 최근에 와서 채택된, 거짓된 교리에 대한 새로운 주제입니다. 이 특별한 교리는 칼빈의 신학체계와 더불어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어떤 영국 교회의 한 목사가 이 교리를 부활시키고 재성명함으로써 신뢰를 얻게 되던 19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이 교리는 별로 주목을 끌지 못했습니다. 이때부터 흔히 어떤 사람의 두뇌에 의해서 창조된 다른 신학적 교의와 마찬가지로 이 교의도 일반적인 일련의 지지자를 얻게 되었고, 동시에 이것은 몇 개의 교파들의 신조에 흡수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이 교리는 일종의 부활을 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어떤 교파 속에서는 이 교의에 대하여 널리 변호하고 있기 때문에, 이때는 이 교리가 참인지 거짓인기를 결정지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이 교리에 대하여 '영원한 보장' 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일단 구원을 받게 되면 그는 영원히 구원받은 것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었으므로 그는 그 후 현세와 내세에 있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교리를 말합니다. 이 교리는 한 번 구원을 받은 사람은 불순종을 통해서 때때로 하나님의 분노를 초래할 수도 있고, 동시에 깊은 죄속 으로 타락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자녀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 때에 그는 잠시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상실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는 깨어지지 않은 채 남아 있고, 또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마지막에 구원을 회복하여 천국으로 영접된다고 주장합니다. 이 교리에 대해서 그 변호인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논의할 여지도 없이 성서적 권위에 입각한 것이라고말합니다. "탕자가 있었지 않았느냐? 그가 먼 나라에 가서 머물 때에 허랑방탕한 생활로 그의 재산을 허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아들이었지 않았느냐?" 고 질문합니다.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본문 중의 하나는 요한복음 10:28-29의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는 말씀입니다. 인기가 더하여 가는 교리 '영원한 보장' 이란 칼빈주의에서 생긴 만큼 이 교리의 지지자들은 자연적으로 「선택」의 교리에 기울어지며 알미니어스주의자와 웨슬레주의자의 「자유의지」에 대한 교리를 반대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들은 칼빈주의가 존재한 이래 이루어 놓은 모든 것보다 기독교에 대하여 더욱 많은 성과를 거둔 부흥운동으로서 18세기에 있었던 위대한 성결 부흥운동에서 가르친 "완전 성화" 의 교리에 대하여 맹렬히 반대합니다. 그리고 또한 대륙을 흔들었고 수많은 사람을 회개케함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인을 받은 이 위대한 복음주의 운동의 면전에서 성결의 적들은 아직도 싸우려 하며 대담하게도 죄 없이 살 수 있는 신자란 존재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언 곧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느니라" (요한일서 3:9)하신 말씀에 대한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파괴함이 없이 죄에 대해서 뒷 구멍을 허용하는 「영원한 보장」과 같은 교리는 현대 종교가들의 육욕적 생각에 이것을 적응시키기 위해서 의의 표준을 낮추려는 자들의 신학적 설계에 완전히 부합됩니다. 이러한 이유로서 영원한 보장은 이 마지막 때에 증가하는 배교자들 사이에서 급속히 인기 있는 교리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것이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거침돌이 되기 전에 이 교리의 허위성을 폭로할 적절한 시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하다 에스겔서 18:24에 보면,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죄를 범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따라 행하면 살겠느냐?" 고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은 「영원한 보장」의 변호자를 당황케 하는 질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서 예언자 자신이 그 당시에 이와 같은 달콤한 교리에 대한 어떤 변호자들과 마주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각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이 질문이 홀로 이 논쟁을 해결한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보장」의 옹호자들은 에스겔의 말의 뜻을 제멋대로 해석함으로 그들의 주장을 변호하려고 서두르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이 예언자가 중생한 자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했으며, 이 사람의 의는 어디까지나 외부적이거나 율법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것은 중생한 사람의 중심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는 일시적 변명으로서 에스겔의 질문을 일축해 버립니다. 의인 그러나 이 예언자의 질문은 그렇게 쉽게 처리되어 질 수 없습니다. 에스겔은 진리에 깊이 감동되어 그의 예언 전반에 걸쳐 의인에 대한 말을 여섯 번이나 되풀이 한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의인이라고 한 것은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요? 이 장에서 「의로운」이라고 번역된 본래 히브리어의 형용사는 싸딕(tsaddig) 인데, 이 말은 구약 전반에 걸쳐서 한결같이 악한 자와 의로운 자, 불경건한 자와 경건한 자, 구원받지못한 자와 구원받은 자를 대조하기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이 맡의 어원은 한 가지 형태나 혹은 다른 형태태로서 노아로부터 내려오는 거의 모든 하나님의 사람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하박국서의 저 유명한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박국 2:4)는 구절에도 사용된 말입니다. 여기서 의인이라는 맡은 중생한 사람을 의미한다는 것은 신약성서에 인조로 사용된 것으로 증명됩니다. 성서에 기록된 의인이란 중생한 사람을 의미한다는 명확한 증거로서 우리는 성경 말씀 한 절을 더 인용합니다.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한일서 2:29) 성서에 자주 언급된 의인은 오직 외부적인 의를 소유한 자라고 하는 주장은 결국 에스겔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맡하고 있는 의인은 철저하게 중생한 사람 이외의 다른 사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우리의 본론에 돌아갑시다. 만일 중생한 사람이 그의 의로움에서 떠나 불법을 행하게 된다면, 그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그가 샅 수 있을까요? 영원한 보장의 변호자는 오직 하나의 대답을 할 뿐, 더 이상 입을 옅지 않습니다. 그의 학설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그는 확신을 가지고 강조적으로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 그는 악인이 행하는 가증한 일대로 행한다 할찌라도 역시 살 것이다. 언약관계는 깨어지지 않은 채 남으며 그는 역시 하나님의 자녀이다." 라고..... 이와 같은 불충분한 교리를 끝까지 따른다면 논리적인 결론으로서 하나님은 그의 행위와 불의한 생활이 이생에서 화와 고통을 당하며, 또한 장차 올 내세에서 영원한 저주를 받아야 할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될 죄인과 꼭 같은 그런 타락한 자와 언약관계를 유지해야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보장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영원한 헝벌이라니!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그러나 예언자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는 대답합니다. "그가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에스겔 18:24 하반) 하였고, 또 에스겔은 같은 장에서 선언하기를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 (에스겔 18:4)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성도나 죄인이나 구원받은 자나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게나 다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두개의 대답 중에 어느 것이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에 가장 가까운 것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영원한 보장」의 교리에 대한 위의 진술은 과장했다고 반대할런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교리에 대한 정확한 진술은 죄에 대하여 그같은 허가를 주지 않았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조금도 과한 말은 하지 않았다는 증거로서 우리는「영원한 보장」의 지지자가 위의 것은 그들의 입장에 대한 올바른 설명이라고 염치없이 고백하게 하는 구체적인 실례를 주의해 보십시다. 다윗의 범죄 인용된 사건은 모든 사람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이야기로서, 다윗왕의 범죄와 그 후에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한 일입니다. 다윗이 확실히 구원받은 자로서 죽은고로 「영원한 보장」의 지지자들은 그들의 교리를 방어하기 위해서 다윗은 단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떠나 있었을 뿐, 그가 타락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동안도 아직 하나님의 자녀로 있었다는 것을 주장하지 않으면 아니 될 필연성에 놓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점에 대해서 그들은 조금도 어색하게 생각함이 없이 말합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시편 51편에 있는 사죄를 위한 다윗의 기도에 대해 주석하기를 다윗은 구원의 회복을 위해서 간구한 것이 아니라, 다만 구원의 기쁨을 위해서 간구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서 「영원한 보장」의 교리가 그 본색을 드러냄을 보게 됩니다. 다윗의 한 일을 정당하게 생각해 본다면, 그는 의인이었으나 가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아무런 가책도 없이 가장 악한 죄가 되는 다른 사람의 아내를 훔치는 일을 하고, 또 그의 가정을 파괴하였으며, 그리고는 그의 범죄의 무고한 희생이 된 살인을 고의적으로 수행한 범죄의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보장을 주장하는 자들은 아직도 다윗이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를 상실하지 않았고 다만 일시적으로 하나님을 불쾌하게 한 것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다윗이 그의 구원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기쁨을 일시적으로 상실했을 뿐이라고 맡합니다. 이것이 「영원한 보장」의 궁극적인 분석입니다.이러한 교리의 고취로 말미암아 깨끗한 성서의 표준과 거룩한 생활이 어떠한 종파 안에서는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갖은 죄가 종교라는 가면아래 숨어서 이 말세에 허용되고 있다는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타락자의 회복 이 소책자에서 이와 같이 지금껏 말해 온 것은 은혜의 자리에서 타락한 자는 그 은혜를 다시 회복할 수 없게 된다는 관념을 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주장해 온 점은 그의 타락으로 그는 자기의 구원을 상실하고, 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든 권리를 상실하게 되지만 그러나 죄인으로서 다시 하나님의 사죄를 구하는특권과 원상으로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다윗이 타락했던 것과 같이 비참하게도 하나님을 저버리고 가장 사악한 죄 가운데로 타락한 사람에게까지라도 미치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자비를 기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돌아올 때 명심할 것은, 「영원한 보장」의 지지자가 우리에게 믿게 하려는 것처럼 그는 단지 불순종의 자녀로서 돌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최소한 자비도 받을 자격이 없는 비참한 죄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돌아와야 할 것이며,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미소가 다시 그의 삶에 임하기까지 다윗이 기도한 것처럼 마음의 애통과 쓴 눈물로써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라도 역시 오랫동안 다윗이 겪었던 것처럼 그의 죄의 결과로 인하여 슬픔을 맛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자비는 결코 소홀히 여길 것이 아닙니다. 배교에 대한 경고 성서는 모든 타락한 자들의 영적인 사망을 가르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타락한 자가 여러 번 범죄를 되풀이 할 때 그는 처음 범죄했을 때의 상태보다 더욱 나쁜 상태에 이르게 됨을 가르칩니다. 다음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베드로후서 2:20-21) 빛 가운데로 인도되었던 사람이 다시 등을 돌려 빛 가운데 걷는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서멀리 떠나면 그는 전연 그 빛을 모르고 있던 죄인보다도 훨씬 그릇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는 더러운 귀신이 나간 사람과 같이 그 귀신이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와서 고의 텅 빈 집에 들어가서 거할때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마태복음 12:43-45 참조) 예수님은 이 사람의 상태를 설명하실 때에 이것을 유대인에게 적용하셨습니다. 한 때에 하나님의 선민이었으나 메시야를 거절한 후에 슬퍼할 상태로 떨어진 잘 알려진 유대인들의 배교는 국가나 개인에 대하여 "생명수의 근원" 인 예수를 저버리는 결과가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불후의 표본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일단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더불어 교통하던 자라 할지라도 '에서'와 같이 여러 번 되풀이되는 범죄를 통하여 회개할 기회를 찾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배교에는 두 가지 무대가 있는데, 첫째는 인간이 하나님을 거절하는 곳이요, 둘째는 하나님이 인간을 거절하는 곳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서간은 이러한 무서은 상태로 떨어지는 것에 대한 엄격한 경고를 울려주고 있습니다. 「영원한 보장」의 교리에 대한 어떤 변호자들은 그들의 교리에다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고자 하는 어려운 시도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성서 전체를 통해 되풀이되고 있는 타락에 대한 경고는 다만 하나님께서 그가 타락한 사람에게 그의 영원한 목적에로 일으키기 위하여 사용한 수단의 하나일 뿐이라고 하며, 또 구원받은 자가 최종적으로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는 어떤 위험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이러한 경고를 통해서 생을 극복하도록 그들을 격려하시고, 그래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게 된다는 것을 믿게 하려 합니다. 우리는 속지 않도록 합시다. "한 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으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히브리서 6:4-6,8) 은혜의 자리에서 타락한 자에게 회복할 수 있는 소망은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신앙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아무 소망도 없는 것입니다. 성서 가운데 영원 보장의 교리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축복은 그들에게 하도록 명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계속 지키는 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 24:13)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쫓지 아니하고 불의를 쫓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느니라" (로마서 2:6-8) 하나님은 그의 명령을 지키는 자를 늘 지켜 주실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위해서도 '영원한 보장' 이란 약속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베드로후서 1:10)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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